글쓰기 팁

아끼는 것을 잘라 내는 법: 현역 소설가의 퇴고 과정

Plotiar 팀12분 소요

작년 6월, 두 번째 소설을 에이전트들에게 보내기 3주 전에 저는 인물 하나를 지웠어요. 문단이 아니에요. 장면도 아니에요. 사람 하나였어요. 세 번의 초고에 걸쳐 마흔한 장면에 등장한 남동생 데즈먼드는, 이 원고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제가 인정하기까지 2년 동안 그 안에서 살았어요. 직업이 있었고, 예정대로 착착 무너져 가는 결혼 생활이 있었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배를 두고 주인공과 끝없이 이어 가는 말다툼이 있었어요. 그 어느 것도 플롯과 닿지 않았어요. 2고를 쓸 때 이미 알았어요. 실제로 잘라 낸 건 4고에서, 밤 열한 시에, 끝내 다 마시지 못한 와인 한 잔을 옆에 두고서였어요. 그때 느낀 건 후련함보다 슬픔에 가까웠어요.

잘라 내는 게 맞다는 걸 아는 것과 실제로 잘라 내는 것, 그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아무도 조언을 써 주지 않아요. 다들 "아끼는 것을 죽여라(kill your darlings)"를 이 말 한마디면 끝난다는 듯 인용해요. 끝나지 않아요. 이 말은 문제에 이름만 붙이고 휙 떠나 버려요. 진짜 시간을 들여 만든 인물 앞에 작가를 혼자 남겨 두고, 그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아요. 저는 이 말이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조언이 틀려서가 아니라, 잘라 내기를 배짱 시험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실제로는 단계가 있는 기계적인 절차고, 그 단계 대부분은 용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요.

정작 그 말을 한 적 없는 사람

들으면 대부분의 작가가 놀라는 사실이 있어요. 윌리엄 포크너는 "아끼는 것을 죽여라"라고 말한 적이 거의 확실히 없어요. 이 말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수사학 교수였던 아서 퀼러쿠치 경이 1914년 강연에서 한 말이고, 1916년 『On the Art of Writing』으로 출간됐어요. 실제 표현은 "아끼는 것을 살해하라(murder your darlings)"였고, 인물이나 서브플롯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그가 말한 건 작가가 혼자 아껴 둔 멋진 표현들이었어요. 가장 자랑스러운 문장, 글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재치 있어서 자꾸 손이 가는 문장들이요. 원고를 어디로 보내든 그 전에 그런 문장을 "미련 없이" 잘라 내라고 했어요.

한 세기 동안 되풀이되면서 이 조언은 문장에서 장면으로, 다시 인물 전체로 번져 갔어요. 출처도 이름 모를 수사학 교수에게서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인용하기 좋은 소설가에게로 옮겨 갔고요. 엄한 조언은 아무도 모르는 교수보다 포크너가 했다고 해야 더 그럴듯하게 들리니까요. 저는 이 변화가 중요하다고 봐요. 퀼러쿠치가 짚은 건 특정한 허영이었어요. 이해받으려고 쓰지 않고 감탄받으려고 쓰는 허영이요. 대부분의 소설가가 실제로 씨름하는 건 그보다 크고, 허영과는 거리가 멀어요. 데즈먼드는 제가 뽐내려고 쓴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었어요. 2년 치 진짜 이야기 노동이었는데, 하필 구조적으로 아무것도 떠받치고 있지 않았을 뿐이에요.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에서 실제 문제의 크기에 좀 더 다가가요. "아끼는 것을 죽여라, 아끼는 것을 죽여라, 그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글쟁이의 가여운 마음을 찢어 놓더라도, 아끼는 것을 죽여라." 저는 이쪽이 더 좋아요. 이 모든 게 취향 문제인 척하지 않고,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솔직하게 말하니까요. 그런데 킹도 문턱까지만 데려다줘요. 문을 열어야 한다고는 말하지만, 어느 문인지 가려내는 법은 알려 주지 않아요.

무엇이 정말 아끼는 것일까

작가들이 자를까 말까 괴로워하는 것 대부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끼는 것이 아니에요. 고쳐 쓰기만 하면 되는 서툰 문단은 아끼는 게 아니에요. 자리를 잘못 잡았을 뿐 구조상 꼭 필요한 장면도 아끼는 게 아니라 옮겨야 할 장면이에요. 떼어 내는 데 정말 대가가 따르는 아끼는 것에는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어요. 그걸 지키려는 이유가 이야기에 필요하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저 자신과 다른 작가들을 지켜보니, 아끼는 것을 지키는 근거는 딱 세 가지였어요. 그중 "이야기에 꼭 필요하다"는 없었고요.

첫째는 공을 많이 들였다는 거예요. 데즈먼드가 아버지의 배를 두고 벌이는 말다툼은 리듬을 맞추는 데만 초고 네 번이 걸렸어요. 정말 잘 짜인 장면이에요. 그래서 위험했어요. 쏟아부은 노력 때문에 솜씨가 좋다는 것과 이야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헷갈렸거든요. 둘째는 재치예요. 퀼러쿠치가 말한 문제 그대로예요. 문장 하나, 구조상의 묘수 하나, 너무 우아해서 플롯에는 필요도 없는 장면들을 그 둘레에 지어 올리게 만드는 복선 하나. 셋째는 내가 쓰고 있다고 믿었던 책을 떠나보내는 슬픔이에요. 어떤 서브플롯은 잘 굴러가서가 아니라, 그걸 잘라 내면 지금 실제로 쓰고 있는 소설이 처음에 쓰려던 소설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해서 초고 세 번을 살아남아요. 그 인정은 그것대로 하나의 상실이에요. 데즈먼드가 지면에서 좋은 인물이었느냐와는 별개로요.

셋 다 잘못은 아니에요. 다만 근거가 못 될 뿐이에요. 아끼는 것인지 가리는 기준은 "내가 이걸 좋아하나?"가 아니에요. 좋은 글은 대개 쓴 사람이 좋아하고, 그게 탈락 사유는 아니니까요. 기준은 남겨야 할 이유를 원고를 읽은 적 없는 사람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해도 그 이유가 버티느냐예요.

자르기 전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요즘은 아끼는 것 같은 대목이 보이면, 손대기 전에 세 가지 질문을 이 순서대로 던져요. 앞질러 가는 건 스스로 허락하지 않아요.

이걸 빼면 책의 다른 곳에서 인과가 끊기나요? "아쉬울까?"가 아니에요. 뒤에 나오는 어떤 장면이, 오직 이 대목 때문에 생긴 정보나 물건이나 결정에 기대고 있나요? 챕터를 하나씩 앞으로 넘기며 따라가고, 기대고 있는 곳이 보이면 전부 적으세요. 데즈먼드의 배 말다툼에 기댄 곳은 딱 하나였어요. 22장에서 주인공이 "데즈가 한 말"을 꺼내는 한 줄이요. 그 줄을 고치는 데 90초쯤 걸렸어요.

다른 인물의 행동이 오직 이것 때문에 말이 되나요? 서브플롯은 플롯이 전혀 건드리지 않아도, 어떤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설명해 준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기둥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데즈먼드를 빼면 3막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죄책감이 갑자기 근거를 잃는다면, 그건 진짜로 기대고 있는 거예요. 그때 해법은 "서브플롯을 살린다"가 아니라 "죄책감의 근거를 더 값싼 데서 찾아 준다"예요.

이 초고를 본 적 없는 독자가 빠진 걸 알아챌까요? 가장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 대목을 쓴 당사자로서는 답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데즈먼드를 뺀 원고를 이전 원고를 본 적 없는 두 사람에게 보냈어요. 주인공의 남동생은 어디 갔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침묵이 진짜 답이었어요.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려 낸 어떤 결론보다 믿을 만했죠.

세 질문을 순서대로 던지다 보면 세 번째에 이르기 전에 대부분 답이 나와요. 결정이 내 의지를 시험하는 신임 투표가 아니라 점검표의 한 항목이 되는 순간, 필요한 배짱은 확 줄어들어요.

잘라 내는 것과 지우는 것은 달라요

제가 데즈먼드를 잘라 낼 수 있었던 건, 전혀 다른 이유로 이미 작업 방식에 들여 놓은 장치 하나 덕분이었어요. 원고 바깥에 조용히 놓인 채, 제가 덜어 낸 것을 없애지 않고 받아 두는 스크랩 폴더예요. 소설에서 인물을 잘라 내는 것과 인물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은 마음이 치르는 대가가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이에요. "아끼는 것을 죽여라"가 실용적인 조언이 아니라 잔인한 말로 들리는 진짜 이유는 이 둘을 한데 뭉뚱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데즈먼드를 잘라 낸 그날 밤, 그가 나오는 장면 마흔한 개를 모두 스크랩으로 옮겼어요. 그 뒤로 그 폴더를 연 건 딱 한 번, 여덟 달 뒤에 궁금해서 배 말다툼을 다시 읽어 볼 때였어요. 원고에 되돌려 놓지는 않았어요. 언젠가 다시 쓸 거라서 남겨 둔 게 아니었으니까요. 중요한 건, 잘라 내기가 그 작업에 가치가 있느냐를 묻는 신임 투표에서 이 책에 들어가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훨씬 작고, 훨씬 답하기 쉬운 질문이죠. 그 말을 하지 않은 포크너와 실제로 한 퀼러쿠치는 한 세기를 사이에 두고 한 가지에는 뜻이 같아요. 내보내지 말고 죽이라는 거예요. 저는 내보내는 쪽이 좋아요. 내보낸 건 이론상 되돌릴 수 있고, 작가의 신경이 움켜쥔 손을 펴는 데는 이론상 되돌릴 수 있다는 것 하나면 충분한 것 같거든요.

잘려 나간 브로드웨이 노래 한 곡에게 배운 것

스티븐 손드하임은 제가 읽은 웬만한 소설가보다 이 맞바꿈을 잘 알았어요. 작곡가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원리는 똑같아요. 1970년 뮤지컬 〈컴퍼니〉(Company) 초연 때, 그는 주인공 바비의 1막 마지막 곡으로 〈Marry Me a Little〉을 썼어요. 기교도 훌륭한 정말 좋은 곡이었고, 관계에 매이는 걸 두려워하는 바비의 속마음을 작품의 그 무엇보다 많이 드러냈어요. 그런데 이 곡은 개막 전에 잘렸어요. 그만큼의 여린 속내를 그렇게 일찍 보여 주면, 바비가 작품 내내 지켜야 할 모호함이 무너졌거든요. 노래가 실패한 게 아니에요. 자리가 실패한 거예요. 10년 뒤 손드하임은 잘려 나간 곡들로 꾸민 전혀 다른 레뷔에서 이 노래가 표제곡이 되게 했고, 이후 〈컴퍼니〉의 여러 프로덕션은 이른 속내 드러내기가 작품에 해가 되지 않는 다른 자리에 이 곡을 되살려 넣었어요.

이 일화가 마음에 남는 건, 제 자식을 죽이는 냉혹한 예술가라는 신화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에요. 손드하임은 노래가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았어요. 자리와 작품과 순간이 잘못됐다고 판단했고, 왜 그런지 충분히 정확하게 알았기에 10년 뒤 그 노래에 두 번째 삶을 찾아 줄 수 있었어요. 이게 바로 스크랩 폴더의 논리예요. 제가 폴더를 만들기 수십 년 전에 이미 실행된 거죠. 이 논리는 제 것이 아니에요. 작업의 완성도와 그 작업이 지금 담긴 그릇에 맞는지를 따로 떼어 봐야 했던 모든 사람의 것이에요. 장면은 좋으면서 동시에 틀릴 수 있어요. 한쪽이 다른 쪽을 지워 버리지 않게 두 사실을 함께 붙드는 법을 익히는 것, 이 기술의 대부분은 그거예요.

애니 딜러드라면 여기서 반박할 거예요. 그런 긴장이 없는 척하기보다 솔직하게 말해 두고 싶어요. 딜러드는 『작가살이』(The Writing Life)에서 거의 정반대 입장을 펼쳐요. "좋아 보이는 것을 책의 뒷부분이나 다른 책을 위해 쌓아 두지 마라. 내주어라, 모두 내주어라, 지금 내주어라." 저는 이 말이 다른 실패를 겨냥한다고 봐요. 가장 좋은 재료를 언젠가 쓸 상상 속 작품을 위해 아끼느라, 정작 눈앞의 원고에는 좋은 생각을 끝내 쓰지 못하는 작가요. 스크랩 폴더는 그런 용도가 아니에요. 제 폴더는 데즈먼드가 주인공인 미래의 소설을 위해 붓는 적금이 아니에요. 옮겨 둔 마흔한 장면 가운데 다시 쓸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봐요. 폴더의 역할은 처음부터 보관이 아니라 허락이었어요. "남긴다"와 "영영 없앤다" 사이의 가짜 양자택일을 치워 줘서 오늘 잘라 낼 수 있게 해 주는 거죠. 길게 보면 솔직한 결론이 제 쪽보다 딜러드 쪽에 더 가깝다 해도요.

배짱 대신 방법이 되는 점검표

인물 단위로 잘라 내고 나면, 같은 원칙을 문장 단위로 좁혀 적용할 수 있어요. 사실 퀼러쿠치의 원래 조언은 바로 이 단위의 이야기였어요. 독자를 앞으로 끌고 가려고가 아니라 감탄받으려고 존재하는 아름다운 문장은 데즈먼드와 똑같은 문제의 축소판이고, 같은 세 질문을 압축해서 던져 볼 만해요. 플롯이 이 구절에 기대는가, 어떤 인물의 다음 행동이 여기에 기대는가, 처음 읽는 독자가 빠진 걸 알아챌까. 9만 단어짜리 원고를 문장마다 감으로 이렇게 훑다 보면, 좋은 작가도 퇴고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지고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하게 돼요. 문장 단위 퇴고 점검표는 바로 그 피로를 되풀이할 수 있는 순서로 바꾸려고 있어요. 힘없는 동사, 군더더기 수식어, 가장 자랑스러운 문장을 매번 같은 순서로 확인해서, 그날 마흔 번째 판단이 네 번째 판단보다 흐려지지 않게 하는 거예요.

데즈먼드를 뺀 원고를 나중에 바로 그런 점검에 돌려 봤더니, 이제는 없는 서브플롯을 받쳐 주려고 일부러 써 넣은 문장이 여섯 개 더 나왔어요. 말하자면 이미 떠나 버린 배와 그 배의 주인이던 남동생을 다시 불러내는 문장들이었죠. 잘라 내기 어려운 건 하나도 없었어요. 어려운 자르기는 이미 끝났으니까요. 남은 건 뒷정리였고, 뒷정리에는 배짱이 필요 없어요. 목록이 있으면 돼요.

자르지 않는 게 진짜 실수일 때

아무도 경고해 주지 않는 실패로 글을 맺고 싶어요. 다들 이야기하는 실패보다 이쪽이 더 흔하거든요. 작가들은 대개 너무 과감하게 잘라서 실패하지 않아요. "아끼는 것을 죽여라"를 한 번 넘고 나면 끝나는 관문처럼 여겨서 실패해요. 프롤로그도 잘라 봤으니 나는 이런 걸 할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하고는 거기서 멈추는 거죠. 그렇게 한 번의 용기로 충분했다는 기분에 젖어, 원고 속에 데즈먼드를 셋이나 더 세워 둔 채로 놔둬요. 잘라 내는 능력은 한 번 얻으면 끝나는 자질이 아니에요. 장면마다, 마지막 퇴고까지 계속 던져야 하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 질문은 인성 시험이 아니라 세 항목짜리 점검표로 대하는 만큼 쉬워져요.

데즈먼드를 잘라 낸 밤 끝내 비우지 못한 와인은, 어찌 보면 지금까지도 그 장면에 대한 가장 솔직한 반응이에요. 승리감도, 후련함도 아니었어요. 진짜인 무언가를 만들었고, 그걸 제대로 옆으로 치웠다는 깨달음이었어요. 직접 짠 의자인데 다리 하나가 부러졌을 때처럼요. 짜맞춤은 자랑스럽지만, 그 의자가 제대로 선다고 우길 수는 없는 거죠.

잘라 낸 장면을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는 버전 기록, 그리고 스크랩 폴더를 제대로 둘 수 있는 프로젝트 구조. Plotiar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만들었어요. 챕터를 잘라 낸다고 그걸 잃을 필요는 없어요. 무료로 시작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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